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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 양치릴로 신부의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 유고집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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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 양치릴로 신부의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 유고집

독서일가

양종인 지음

2021-11-10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김훈 소설 「저만치 혼자서」의 모티브가 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생사관 강의록-마흔 살에 세상을 떠난 ‘대희년의 사제’가 남긴 삶과 죽음에 관한 따뜻한 성찰 선종 당일에도 부산 일정을 위해 길을 나섰던 치릴로 신부 자신의 병이 아니라 일상을 챙기며 생명이 소진된 순간까지 살았던젊은 사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인간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양치릴로 신부) “병고에 시달리던 이 젊은 신부가 죽음이 임박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피는성무(聖務)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감당해나가던 마지막 날들을 보여주면서,삶과 죽음을 장난처럼 가볍게 여겨서 재미없는 놀이를 집어치우듯이자살하는 세태를 향해서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김훈, 소설가) “본 강의록은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며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품위를 거스르는 죽음의 왜곡된 모습을 바라보고,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품위를 지켜나가는 길을 살펴보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양종인 치릴로 신부가 서문에서 밝힌 이 책의 집필 의도이다. 의정부교구 상장례학교장이었던 양 치릴로 신부는 2000년 대희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선종한 2012년까지 12년의 사목 기간 중 7년을 상장례학교를 맡아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양 치릴로 신부는 짧은 생애 동안 4권의 책자를 남겼다. ‘예비신자 교리교안’ ‘영성사’ ‘성사론 강의록’과 이 책 ‘천주교 생사관 강의록’이다. 앞의 세 책은 철저하게 천주교 신앙서로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반면, 이 책 ‘천주교 생사관 강의록’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였다.이 책은 죽음과 관련한 거의 모든 장면을 다룬다. 죽음을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적 관점과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죽음관 등 관념적인 죽음관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자살·안락사·낙태 등 문제적 혹은 논쟁적 죽음의 현상을 교리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요인까지 살핀다. 또한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한 임종자의 죽음을 위한 준비와 함께 사별 가족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배려의 방법을 다루고, 존엄사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한다.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 후 심란해하면서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드러내며, 죽음이 얼마나 인간에겐 대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설명한다.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책에선 죽음이 인간의 원죄에 대한 벌로써 내려졌다는 기원에서 찾는 그리스도 교리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죽음은 인간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남겼고,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존엄을 지키며 그 희망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은 문체가 편안하고, 관점은 따뜻해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색하고 관조하게 하는 힘이 있다.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일관된 주제는 ‘품위 있는 존엄한 죽음’을 위한 준비이다. 어쩌면 이는 평생 병고에 시달리며 마흔 살 되던 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난 그 스스로가 평생을 준비하며 살았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양 치릴로 신부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이래 일생을 각종 병고에 시달렸고, 그 무렵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홀로 병고와 고독을 다스리며 고단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늘 아팠기에 병의 고통에 오히려 큰 무게를 두지 않았고, 엄살도 짜증도 없이 덤덤하게 삶의 고통을 받아들였다.그는 오히려 삶을 즐겼다. 자신을 찾는 곳이면 전국방방곡곡을 어디든 배낭을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다녔다. 선종 당일인 2012년 10월23일에도 걷는 게 힘들었던 그는 지팡이를 짚고서 부산에 일정이 있다며 사제관을 나섰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아파보이는 심상찮은 모습을 본 동료 신부가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병원에 들어간 지 1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생명 마지막 한 방울이 소진되는 순간까지 세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길을 나섰고, 삶이 다한 순간 연명을 위한 기계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그저 죄의 결과일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고통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신비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것과 “의인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어여쁘게 보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로 전환된 것은 죽음을 “모든 희망이 사라진 어둠의 심연”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탈피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음”을 깨닫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무함의 나락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인간 존재는 유한한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유한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 인간의 동경(憧憬)과 갈망은 무제한적 요구와 현세적 실현의 제한성 사이에 분열되어 있다. 인간 존재의 현실은 자신의 갈망이 얼마만큼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되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구체적인 실현은 갈망하는 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즉, 항상 ‘이보다 더 많이’를 원하지만 실현되는 것은 언제나 ‘너무 조금’일 뿐이다. -인생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수없이 많은 좌절 앞에서 내적인 중심을 잡고 새롭게 도전하는 삶 안에서 그리고 수없이 많이 다가오는 큰 고통 앞에서 그 모든 어려움을 내적 심화의 기회로 만들어 나가면서 점점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죽음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완성된다. 죽음을 맞이하며 외적인 것이 완전히 상실되는 순간에, 본연의 내적인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많은 세상의 어려움과 고달픔 속에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기도의 힘으로 이겨나가는 삶, 세상에서의 이익과 출세를 조금은 희생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애덕(愛德)’을 베푸는 삶, 세상의 비전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즐거움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삶 등이 모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교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역시 행복을 추구한다. 이런 현실에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인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역시도 죽는 순간까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살을 하는 사람은 진정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표현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에서 증가하는 자살률을 낮추고 모두가 참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통로가 막혀서 한 번 길을 잃으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나 그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창조주이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존중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이 살인행위는 아무리 선의에서 빚어진 오판의 결과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살인 행위이다.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안락사와 구별되어야 한다.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 기구의 사용을 중단하는 것은 안락사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안락사라기보다는 ‘지나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별 가족에 대한 관리는 환자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임종자가 평소에 죽음을 얼마나 잘 준비했는가에 따라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환자가 임종을 할 때까지 어떻게 간호했으며 어떤 과정으로 가족의 죽음을 준비했는가의 문제는 임종자의 가족이 어떻게 사별의 현실에 적응해 가는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죽음에 대해서 완전한 끝이며 끝없는 허무의 수렁에 빠지는 소멸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어떤 기준에서 존엄사와 안락사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의학적·윤리적으로 여러 가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삶과 고통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저 육체적인 안락과 고통의 회피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안락사의 범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삶의 참된 가치를 실현시키고 그러한 삶의 참된 가치를 통해서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받아들이는 자연적인 죽음은 존엄사의 범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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